미술작품 감상

이중섭 거리에서.....

두래박 2023. 4. 18. 07:30
728x90

 

 

 

이중섭,  흰소, 종이에 유채,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 첫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32×4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 닭과  병아리,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30.5x5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 거리는 화려하다.

카페, 음식점, 공방, 꽃집. 선물가게 등이 개성적인 옷을 갈아입고 어우러져있다. 
가로등 전신주는 이중섭의 그림으로 디자인 한 조형물을 무겁게 매달고 있고, 거리를 걷다 보면 그의 그림으로 음각된 보도블록도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이중섭이 살았던 집이 길가에 낮게 웅크리고 자리 잡고 있고, 가까이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미술관이 있다. 
거리는 약간의 경사가 졌는데 아래쪽을 바라보면 눈앞에 시원스레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중섭(1916 - 1956),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추앙받지만 살아생전에는 지독한 가난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이다.
6.25 때 가족과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제주도 서귀포, 지금의 이중섭 거리가 있는 이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가 1년 남짓 살았던 집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초가삼간의 단출한 집이다. 통째로 살아도 옹색한데 이중섭은 이 집의 방 한 칸에서 아내와 아이 둘 네 명이서 살았다.
어른 한 명 누우면 가득 찰 것 같은 좁은 방에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과 함께 살았지만 가족과 살을 비비며 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시절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은 끝내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첫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고, 일본인 아내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돌아간다.
젊은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처자식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자학하고 깊은 한숨과 눈물을 토해냈을까?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다.  
가까스로 여비를 장만한 이중섭은 가족을 찾아 일본을 찾지만 그곳에서도 비비고 들어설 틈을 찾지 못한다. 단 5일의 해후를 끝으로 그는 가족과 다시 이별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산, 대구, 통영, 서울 등을 떠돌면서 생활한다. 
소중한 가족과 헤어져 사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작품 속에 묻혀 생활한다. 
가족과의 재회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어린아이들과 가족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은 영양실조와 정신 분열증, 게다가 간염이 겹쳐 한참 활동할 젊은 나이인 40세에 고단한 삶의 짐을 내려놓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을 멀리 일본에 남겨둔 채.
 
​사랑 열정만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던 이중섭의 말이 거리를 산책하는 동안 동굴 속 울림처럼 내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가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는 살아생전 행복했을까?

이중섭거리
화려하고 풍요로움이 가득 찬 거리,
이중섭의 발자취를 찾아서, 그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서, 그를 그리워하며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나는 그의 혼이라도 이 거리를 굽어보며 위안을 받기를 소망했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64.5cm, 개인소장

 

 

 

 

이중섭, 도원(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3×15.4cm,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이중섭(1916 - 1956)

 

 

728x90